시사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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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회 2007년02월11일
<망부가 45년, 독일 아리랑>

구동독은 사회주의 국제주의 연대를 표방하며 북한유학생 수백 명을 동독으로 받아
들였다. 50년 대 초 독일로 들어온 청년들은 20세 초반의 젊은 나이었고 이둘 중 일
부는 동독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50년대 후반부터 베를린 장
벽이 세워지는 1961년 8월까지, 북한유학생 20여명이 서독으로 망명하는 사건
이 일어나고, 수정주의를 청산하려는 북한의 노력과 맞물려 북한은 독일에 있던 유
학생들에게 소환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45년이 지난 오늘. 독일에는 북한으로 함께 들어가지 못한 북한 유학생의 독일 부인
과 이들의 2세가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가족을 45년 간 기다리며 살고 있다. 정치적 상
황의 변화에 의해 생이별한 이산가족의 슬픔이 비단 한반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독일 곳곳에 남겨진 북한 이산가족들, 이들의 슬픔 역시 우리의 아픔이고 우리 민족
의 역사가 만든 숙제이다. 레나테 홍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과 남편을 만나기 위
한 지난한 노력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이산가족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고민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 그리움 하나.

"그는 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어요.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나 그만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답니다."

  45년 간 홀로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며 지낸 레나테 홍(70). 노란머리의 인자한 인상
의 순수 독일인 할머니의 성은 ‘홍’이다. 1953년 국비유학생 자격으로 동독에 유학 
온 북한 유학생 홍옥근(73)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 그녀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아들을 낳고 1960년 독일 예나에 홍씨 일가를 꾸렸다. 
 하지만 급격히 냉랭해진 세계정치 상황으로 남편은 1961년 북한으로 소환되었고 부
인과 두 아들은 독일에 남게 되었는데... 어느새 아리따웠던 여대생은 주름살 깊은 
할머니가 되었고. 그리움으로 보낸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올 뿐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한글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첫째 아들 현철 홍과 부모님처럼 화학
자가 된 둘째 아들 우베 홍 역시 여전히 ‘홍’ 씨 성을 쓰며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
다. 
 적십자사와 독일외무성에 탄원서등을 보내고 북한 대사관에 비자 신청하는 등 남편
을 찾기 위한 노력을 수십 년 째 계속 해오고 있는 홍 할머니는, 남편이 그리울 때면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예나대학교를 찾아가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아보며 눈물
을 짓곤 하신다. 재혼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본다. 


♥ 그리움 둘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는 헬가 리(70). 자신과 비슷한 사연의 레나
테 홍 할머니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것이다. 1961년 소환 명령이 떨어지자 남편 리
정호(73)는 헬가와 딸 순희를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갔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시댁 식
구들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지냈던 헬가 리 할머니. 하지만 둘째 ‘순자’의 출산 때문
에 잠시 독일로 나온 게 남편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60년대 초, 북한의 외국인 배척 
정책으로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던 것. 힘들었지만 홀로 두 딸을 키워
내고 여전히 해맑은 웃음을 간직하고 계신 ‘리’할머니도 남편 생각만 하면 그리움에 
눈시울이 젖는다. 
 그들의 절절한 사랑을 담아 나눴던 편지만 해도 큰 앨범으로 7권. 어느새 그 편지들
의 나이도 50살이 다 되었건만, 애절한 글씨의 주인만은 헬가를 포기하지 못한 대가
로 함경북도 무산으로 좌천 되었다.     
 소복소복 눈이 흩뿌리던 날. 독일 외무성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50년 전 자료를 수소
문해 할머니에게 찾아간 한국의 취재진에게. 할머니는 젊은 시절의 남편 친구들을 
보는 것 같다며 눈물을 지으셨다. 그녀가 가슴 속에 간직했던 그리움을 풀어본다. 


♥ 그리움 셋.
  
 동독 최고의 훔볼트 대학 한국어과 1기인 브리기테 카이켄봄(73). 4개 국어를 구사
하고,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엘리트 여성이다. 한국의 가곡이 좋아 
찾아간 가곡 발표회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공대생이지만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낭만청년 ‘강의상’(74)과 사랑에 빠진 브리기테. 독일에서의 탄탄한 미래를 포기하
고 그를 따라 북한으로 갔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딸 강순애의 병을 치료하고
자 잠시 독일로 나왔다가, 북한의 비자 거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들려오는 건 
남편이 교통대학 교수로 일하며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차표를 할머니에게 보냈
다는 이유로 함흥의 연구소로 좌천 되었다는 소식 뿐. 써보지 못한 그 기차표처럼 낡
을 대로 낡아버린 남편의 마지막 편지만큼 할머니의 마음도 그리움으로 너덜너덜 해
졌다.  
 아들에게도 남편 성 대신 자신의 강 씨 성을 물려준 딸 순애와 남편을 꼭 닮은 손자 
강 브루노가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그리움 넷.

 할머니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편을 찾기 위해 북한대사관과 적십자사를 찾아다녔
던 안네리제 크노르(73). 계속 침묵만을 일관하던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에서는 “주민
들이 신고없이 이동도 못하는데 어떻게 소재를 모를 수 있느냐?“ 며 호소하다가 쫓
겨나기도 했다. 그의 남편은 드레스덴 공대 화학과에서 만난 최득찬(78). 1961년 소
환명령이 내려지자 함께 서독으로 망명할 고민도 했었지만 북한에 남아있는 15명의 
동생들에게 해가 될까봐 북한으로 들어갔었다. 처음 직장은 평양에 있는 경공업위원
회 중앙연구소. 62년 둘째를 낳으려 독일로 돌아 온 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남
편도 신의주에 있는 경공업연구소로 좌천되었다.제작진이 찾아낸 문서에 의하면 그 
후, 최득찬은 몰래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넘어 탈출하려다 발각되었다고 한다. 그 사
실을 모른 채, 안네리제와 두 아들, 헨리 최와 우베 최는 한번이라도 최득찬을 보고 
싶어 한다. 
 ”제게 있어 최득찬과 관련된 부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깁니다. 평생 끝나지 않
을 거예요“ 상봉이 이루어져 안네리제의 한이 풀릴 수 있을까?  


독일에 그어진 삼팔선

♣ 그들이 동쪽(동독)으로 간 까닭은?

한국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50년 대 초반. 전쟁 통의 혼란스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북
한은 왜, 그리고 어떻게 대규모의 국비유학생을 독일로 보낸 걸까? 52년, 한국전쟁
이 교착상태에 빠져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북한 정부는 전후의 복구사업과 휴전 
후 북한 각계 지도부를 형성할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느낀다. ‘사회주의 연대’를 외치
던 50년대 소련과 동독을 비롯한 동구사회주의국가들은 사회주의 형제국을 표방하
며 유학생에 대한 전폭적인 경제적 지원 약속과 함께 북한의 유학생들을 받아들였
다. 북한 정부는 최고의 엘리트들을 선발하여 과학 기술분야의 선진국이던 동독으
로 이들을 보내게 된 것이다.


♣ 모두들 “와, 한국학생이다.” 라고 했죠. 

그만큼 그들은 세련되고 멋졌어요. - 헬가 리

  당시 50년대 초중반 동독의 대학생들은 정부로부터 150 동독마르크 정도의 생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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